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리 앙투아네트 (문단 편집) === 문화 === 항상 유행의 최첨단에 섰던 패션 스타였다. [[로즈 베르탱]]이라는 평민 출신 [[드레스]] [[디자이너]]와 개인 헤어 스타일리스트를 두었으며, 그녀가 입은 옷 스타일이나 색은 패션잡지에 찍혀 [[유럽]] 곳곳으로 퍼졌다. 당대 패션 리더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타일은 패션 잡지였던 르 메르쥐르 갈량의 판화에 새로운 스타일의 드레스를 입고 궁을 거니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유럽 전역에 널리 퍼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침마다 2시간 넘게 직물 샘플과 디자인을 검토하고 옷을 주문했는데, 그 중에서 깃털과 섬세한 레이스를 좋아했다고 한다. 왕비의 옷은 유럽 궁정에 퍼져 새로운 유행이 되었다. 젊었을 때엔 머리를 벌집처럼 높이 틀어올리는 푸프(pouf)와 화려한 [[드레스]]를 유행시켰고, 나이가 들면서는 18세기 상류계급 여성의 복장으로 자리잡게 되는 스타일인 수수하고 편안한 모슬린 드레스를 처음 유행시켰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장녀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낳았을 때, [[루이 16세]]는 [[난산]]으로 고생한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 [[별장]]인 프티 트라아농 궁을 마련하였다. 흔히 떠돈 소문과 달리 이 궁은 궁전 치고는 제법 작은 편이고, [[정원]]을 중심으로 하는 편안하고 수수한 곳이었다. 애초에 요양을 위한 곳이었기에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곳에는 [[뒤바리 부인|마담 뒤 바리]]에게 받은 가구들을 비롯해 왕실에서는 적은 지출로 마련한 곳이었는데, 자신의 취향을 담은 가구들이 마련되어 있다. 전체적인 센스가 좋았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부들이 유행을 이끌었던 [[루이 14세]], [[루이 15세]] 시대와는 달리 왕비 본인이 유행을 이끌었기에 [[베르사유 궁전]]을 비롯한 궁정에서 확고한 자기 취향을 고수했다. 음악에 관심이 많아서[* 직접 작곡하지는 않았으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작곡한 것으로 추정되는 소품이 하나 있긴 하다. 음악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있던 시절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에게 배웠다. 그 덕택에 글루크는 프랑스에서 활동할 때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후원을 받았다.][* 어린 시절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연주여행을 다니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직접 만난 적이 있다. 7살의 모차르트가 어른이 되면 동년배인 마리와 결혼하겠다고 다짐했단다. 어린애가 한 얘기라서 왕실 사람들은 모두 웃어 넘겼다고 한다. 이 에피소드는 [[클래시컬로이드]]에서도 나온다.] 궁정에 스스로 최신 [[오페라]]를 도입했고, 자신이 배우가 되기도 하였다. 또 예술적 안목이 상당해서 [[베르사유 궁전]]의 인테리어를 새단장하기도 했고, 그녀가 설계한 쁘띠 트리아농[* 시할아버지 [[루이 15세]]가 지은 사냥용 주택을 개조하고, 정원과 연못, 나무, 돌 등 주변 사물까지도 하나하나 배치하였다. 가장 인위적으로 자연스러운 예술품이라는 별명이 있다.]은 섬세하고 우아한 [[로코코]] 문화의 극치로 평가된다. 그 식견처럼 재능 있는 [[화가]]를 보는 능력도 뛰어나, 당대 높은 인기를 구가하던 동갑내기 여류 화가 엘리자베스 비제-르 브룅을 궁정화가로 발탁해 수많은 초상화를 그리게 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에 대한 벽이 높았던 당시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발탁이었다. 비제-르 브룅은 이후 아카데미 회원 자격도 얻게 되는데, 이를 두고 앙투아네트의 입김이 작용했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러나 후세가 인정하듯 르 브룬은 당대의 일류 화가였다. 만약 그녀가 아카데미 회원 자격을 얻게 앙투아네트가 손을 썼다고 해도, 그것은 비난받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앙투아네트 왕비의 뛰어난 식견을 대변하는 조치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평가는 '''[[로코코]]의 여왕.'''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 시기 절정에 오른 로코코 문화는, 뒤이은 [[프랑스 혁명]]으로 갑작스레 종말을 고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혁명 이후에는 그리스 로마 문화 예술이 재유행하면서 고전미로 돌아가게 되는 [[신고전주의]] 복식의 시작을 연 인물이기도 하다. [[조제핀 드 보아르네]]로 대표되는 신고전주의의 엠파이어 스타일(1789~1815) 시대는 [[고대 그리스]]풍에서 따온 슈미즈 아 라 렌과 이를 화려하게 더한 엠파이어 드레스로 유명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의 슈미즈 아 라 렌이 이때까지의 과도기의 역할을 맡았다. [[연극]]이 유행하던 당시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에서 축소형 농장을 만들어 시골풍 옷을 즐겨 입고 연극에서 젖 짜는 처녀 역할을 주로 맡았다. 이때 마리 앙투아네트가 입은 옷이 슈미즈 드레스로, [[영국]]에서는 퀸즈 가운이라고도 불렸다. 이 복식이 일반에서도 퍼져서 유행하게 되었고 1780년대에 이 스타일이 절정에 이르게 된다. 대부분 실크, 무슬린, 면직물로 만들어진 게 특징으로 속에 파니에를 입지 않아 자연스러운 실루엣이었으며, 스토마커나 [[코르셋]]으로 몸을 조이지 않아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네크라인은 깊고 넓게 파여 여러 층의 러프 칼라를 달았고 소매는 풍성한 허리통을 중간 중간에 한두 번 오므려서 부풀린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썩 반응이 좋지 않았는데, 손에 [[장미]] 1송이를 들고 밀짚모자와 흰 모슬린으로 만든 슈미즈 아 라 렌이 처음 등장했을 당시 "이게 무슨 꼴이냐"며 다들 왕비를 욕했다. 그럴 만한 게, 당시까지만 해도 슈미즈는 그냥 속옷 내지는 잠옷이었기 때문에 욕을 먹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옷의 재료인 모슬린이 외국산이라서 욕을 많이 먹자, 결국 비공개 처리하고 국산 실크 산업을 독려하고자 국산 실크로 만든 드레스에 그림을 같은 구도로 재현한 위에 나오는 사진으로 대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